이 이름이 내게 온 지 스무 해가 넘었다. 20여 년 전, 한 스님이 우리 집을 다녀갔다. 나는 그때 내가 만든 단차 두 편을 선물로 드렸다. 먼 길 오신 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차였고, 내 손으로 만든 차였기에 정성껏 내어 드렸다. 그 차가 어떤 인연을 데리고 올지는 알지 못했다.
얼마 뒤 그 스님이 다시 찾아왔다. 손에는 한문으로 쓴 두 글자가 있었다.
神目.
신목.
스님은 내가 드린 차 두 편 가운데 한 편을 은사 스님께 올렸고, 그 은사 스님께서 이 호를 내어 주셨다고 했다.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먼저 가라앉았다. 차 한 편이 사람의 손을 건너가 이름이 되어 돌아온 일이었다.
그 이름을 곧바로 쓰지는 못했다. 그 이름을 내 이름처럼 부르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. 내가 스스로 지은 호가 아니었고, 누가 쉽게 붙여 준 이름도 아니었다. 차를 보고, 그 차를 만든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내어 주신 이름이라 여겨졌다. 그래서 한동안 그 이름은 바깥에 걸지 않고 마음 안에 두었다.
神目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풀고 싶지는 않다. 내게 그 이름은 바르게 보라는 뜻으로 남아 있다. 눈에 보이는 모양만 따라가지 말고, 마음이 앞서지 않게 하라는 뜻이다. 차를 대할 때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, 그때그때 차가 놓인 자리를 살피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.
차를 만들다 보면 늘 선택의 순간이 온다. 지금 멈출 것인가, 조금 더 기다릴 것인가. 손을 더 넣을 것인가, 여기서 그칠 것인가. 불을 밀어야 하는가, 낮추어야 하는가. 이 판단은 말로만 되지 않는다. 눈이 먼저 보고, 손이 따라가고,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.
차 앞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특별한 기술보다 마음이 앞서지 않는 일이다. 좋은 결과를 빨리 얻고 싶으면 손이 급해진다. 향을 욕심내면 불이 지나칠 수 있다. 반대로 두려움이 앞서면 필요한 힘을 넣지 못한다. 차는 늘 그 사이의 바른 자리를 요구한다. 나는 그 자리를 중정이라고 생각한다.
중정은 멀리 있는 말이 아니다. 잎을 볼 때 잎의 상태를 그대로 보는 일이다. 불 앞에 설 때 불의 세기를 내 마음대로 끌고 가지 않는 일이다. 손을 쓸 때 더하고 싶은 마음과 멈추어야 할 때를 함께 보는 일이다. 차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, 내가 지금 무엇을 앞세우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. 그 확인이 흐트러지면 차도 함께 흐트러진다.
그래서 신목은 내게 자랑보다 경계에 가까운 이름이다. 더 뛰어나게 보라는 뜻보다 더 바르게 보라는 뜻이다. 남보다 앞서 보라는 이름이 아니라, 내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 때 다시 가운데로 돌아오라는 이름이다. 차를 이긴 사람처럼 서지 말고, 차 앞에서 몸가짐을 바로 하라는 이름이다.
시간이 지나 차를 만들고, 실패도 하고, 다시 고치고, 다시 불 앞에 서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. 이 이름은 나를 꾸미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. 내가 차 앞에서 지켜야 할 기준을 잊지 말라고 온 이름이었다. 이름은 받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, 그 이름에 맞게 살아가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.
지금 생각해 보면, 그 이름 모를 스님은 내 차의 맛과 함께 차를 대하는 마음도 보았을 것이다. 그 차를 만든 사람이 무엇을 보려 하는지,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, 쉽게 흔들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는지를 보았을지도 모른다. 그 뜻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. 다만 그 인연이 남긴 두 글자는 지금도 나를 차 앞에 세운다.
신목 오동섭.
이 이름은 높임보다 약속에 가깝다. 차 앞에서 몸가짐을 바로 하라는 이름이고, 눈을 흐리지 말라는 이름이며,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 때 다시 가운데를 찾으라는 이름이다. 함부로 하지 않는 마음, 끝까지 살피는 눈, 가운데를 잃지 않으려는 차인의 이름이다.